이번 글에서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음악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기존의 음악형식을 벗어나, 명실상부하게 "실험예술" 정신에 입각한 전자음악작품들이다.
우선 여기서 일단 기존의 서양음악이 어떻게 감상되는가하는 감상방법에 대하여 좀 살펴보자. 음악회장에서 악기(성악포함)에 의해 연주되는, 말하자면 우리에게 친근한 기존작품들은, 음악회라는 공간적 형식을 통하여 듣는 이에게 전달되고 감상된다. 이러한 음악회라는 형식은 수백년의 서양음악역사를 거치면서 청중과의 만남을 주관하는 장으로서 발전, 정립되었다. 이렇게 우리에게 친숙한 음악회라는 형식은, 청중과 연주자가 모두 음악에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을 이상적으로 간주하고 발전해 왔고, 그런 이유 때문에 어떻게 보면 폐쇄적인 성격을 갖는다고도 할 수 있다. 즉 연주하는 사람은 연주를 하고 청중은 감상을 하는, 말하자면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따르도록 되어있는 씨스템이다. 예를 들자면, 연주자는 악보를 통하여 작품을 충실히 해석하여 작곡자의 의도를 충분히 전달하는 것이 목적일 것이다. 이를 위하여 청중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음악을 집중하여 듣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연주동안에는 가능한한 소음을 내지않고 음악에 귀를 귀울여야한다. 여기서 연주되는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한번 연주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작품들로서, 이는 보통 말하자면 시간이라는 것을 "통시적(lineare)"으로 두고 음악을 감상하는것을 전제로 하는 음악들이다. 즉 예를 들어 소나타형식 악곡의 경우 "제시부--> 발전부--> 재현부"의 순서대로 음악이 연주되어야만 악곡의 구성미가 의도한대로 연출될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곡이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연주되어야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친근한 음악에 있어서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그러나 현대음악에 있어서는 이와는 다른 상황이 꽤 있다. 즉, 작품을 1마디부터 120마디까지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띄엄띄엄 연주한다던지 아니면 거꾸로 연주하는 것을 토대로 써진 작품들도 있다. (앞에서 살펴본 Stockhausen의 Mixtur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연주한 이후에 거꾸로, 즉 끝에서부터 처음으로 연주하도록 되어있다) 즉, 통시적인 시간관념을 토대로 음악작품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이외의 다른 시간 개념을 사용하는 작품도 많다. (예를 들자면 서양만찬코스의 메뉴가 순서대로 나오는것과 우리전통 한식이 "몇첩반상"을 기본으로 하며 모든 음식을 함께 먹으며 그 사이에서 맛의 조화를 찾는것과 비교할 수 있을것이다.) 우리도 한번 종전대로의 개념, 즉 음악회장, 악기, 완성된 형식으로서의 작품을 작곡한다는 생각에서 한 발 벗어나서 그 외이는 어떤 아이디어가 있을까를 생각해보자. 모든 음향현상을 음악적인 의미와 연결시키고, 확장된 개념에서의 음악악기를 실험을 통해 개발하고, 그에 따른 음악 저변을 넓혀본다면, 종전의 음악회라는 형식, 즉 연주의 감상자체에 집중된, 어떻게 보면 제한된 형식을 탈피하여, 하나의 음악 작품을 감상할때 청중으로 하여금 그 체험을 공유하게 할 수 있다면 그 체험은 감상이라는 행위보다 훨씬 더 값질 것이다.
배경이 되는 음악철학적상황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서 생기는 또 다른 예술적 상상력을 작품의 원동력으로 하는 음악은 청중에나 작곡가에게 모두 값지고 고유한 경험이 될 것이다. 직감적이면서도 관념적인 음악적 교감을 물리적으로 체험하게 것, 이것이 이루어 질 때 청중은 음악을 일종의 현상으로서 수용할 수 있게 되고, 또한 음악을 받아들이는 객체임을 지나서,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주체자의 몫을 연주자와 함께 공유할 수 있을것이며 이는 매우 값진 경험이 되리라 생각한다. 앞으로 나오는 글, 특히 "sound installation"글에서 이렇게 통시적이외의 시간감지를 요하는 작품에 대해 더 자세하게 들어가보도록 하자.
1931년 생의 미국 작곡가 앨빈 루시에(Alvin Lucier)는, 음악을 현상으로서 고찰하고 이러한 현상들을 귀로서, 또 어떨때는 온 몸으로 감지되도록 한다. 이 글의 부제인 "전자음악의 시인" 이란 표현은, 그의 동료이자 역시 전자음악의 분야에서 창조적이고 앞서 나아갔던 미국의 여류 작곡가, 폴린 올리베로스(Pauline Oliveros 1931-2016)가 앨빈 루시에를 일컬어 한 말이다. 또 다른 그의 동료작곡가 제임스 테니 (James Tenney, 1934-2006)는 루시에를 가르켜 “자연과 과학이 갖는 시적인 요소를 음악을 통하여 표현하고 있다”고 평했다. 필자는 이러한 간단한 표현들에 루시에의 작품세계가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루시에의 음악을 아직 들어본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의 음악이 어떠할 것이라는 상상을 하는데 적절히 도움이 되리라 믿어 여기서 언급한다. 또한 이 표현은, 또 전자음악이 기계적이고 "반 음악적" 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는 이들에게, 전자음악이 갖는 진정한 음악적 성격을 전달할 수 있는 한 예가 되는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루시에의 작품은 Sound Installation (설치 음악)과 기존 작곡세계와의 접점에 위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생전의 여러 인터뷰에서 그가 밝히고 있듯이, "자신의 전자음악을 통해, 소리를 '볼 수 있게끔' 만들고 (소리의 시각화), 청취 불가능한 소리에 형체와 생명을 불어넣어 청취와 감지가 가능하게 하며, 나아가 이러한 음향세계가 주위세계와 균형있게 조화를 맞추게 하는 것" 등의 자신의 아이디어를 말하고 있다.그의 작품에는 시각적인 내용을 음악언어로서 표현하는 작품, 또는 뇌파를 라이브 퍼포먼스의 한 요소로 받아들인다든지, 공간음향과 그의 물리적 현상을 하나의 음악적 주체로서 사용하는 것, 또 다르게는 물리적인 파장을 음악언어로 변용시켜서 바탕으로 만든 작품등을 살펴 볼 수 있는데, 이러한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그가 추구하는 음악세계를 실험하고 타진했다. 우선 그의 작품들의 제목을 보면 “music on a long thin wire (1977)” , “music for pure waves, bass drums and acoustic pendulums (1980)”, “music for snare drums, pure wave oscillator and one or more reflective surfaces (1990)”, "music for cello with one or more amplified vases (1993)" 등, 그 제목으로만 미루어 보아도, 그가 어떤 식으로 음악외적 요소를 포괄하여 자신의 작품에 사용하고 있는지를 엿 볼 수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우선 널리 알려진 작품, "I am sitting in a room" (1969/70) 을 손꼽을 수 있다. 이는 공간에 의해 생성되는 음향적 변용을 통하여, 하나의 공간을 귀로서 익히고 진단, 나아가 체험할 수 있게 만드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이 작품을 한번 살펴보자. 한 공간에 (여기서는 필자는 영어의 “room” 을 “공간” 또는 “홀“이라 번역한다.) 마이크, 두개의 테이프레코더, 그리고 스피커를 설치한다. ‘테이프레코더 1‘ 은 마이크와 연결이 됨으로써, 곧 마이크에 입력되는 신호를 녹음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여기서 "마이크에 입력되는 신호"란, 이 공간에서 일어나는 음향상황을 말하는 것이 되며, 이것이 마이크에 포착됨으로써, 녹음기에 녹음되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테이프레코더, 즉 ’테이프레코더 2‘ 는, 홀 안에 설치된 스피커와 연결시킴으로써, ’테이프레코더 2’에서 재생되는 소리가 홀 안의스피커를 통하여 공간으로 흘러 들어오게 한다. 이와 같이 마이크와 스피커가 함께 설치된 홀 안에서, 한 텍스트를 낭독한다. 작곡가 루시에는 여기에 낭독되기 알맞은 텍스트를 직접 지어서 제시하고 있다. ” I am sitting in a room"으로 시작되는 이 텍스트에는, 이것이 읽힌 뒤에 어떤 식으로 계속 사용이 되며, 어떤 현상을 거쳐서 무엇이 남을 것인가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텍스트는, 이 작품에서의 소리재질로서 사용될 뿐만 아니라, 작품이 전개되는 상황을 해설하는, 작품해설의 나레이터 역할도 담당하는 이중 역할을 담당한다.
“ I am sitting in a room different from the one you are in now.
I am recording the sound of my speaking voice and I am going to play it back into the
room again and again until the resonant frequencies of the room reinforce themselves so
that any semblance of my speech, with perhaps the exception of rhythm, is destroyed.
What you will hear, then, are the natural resonant frequencies of the room articulated by
speech. I regard this activity not so much as a demonstration of a physical fact, but more
as a way to smooth out any irregularities my speech might have. “
이 텍스트가 홀 안에서 마이크를 통해 낭독되면 마이크는 이를 곧바로 녹음한다. 텍스트를 끝까지 읽고 난 뒤, 즉 녹음이 끝난 후, 테이프를 첫 부분으로 리와인드 시킨 뒤 이를 동시에 홀안의 스피커를 통하여 재생시켜 우리가 앉아 있는 홀에 들리게 한다. 한번 녹음된 낭독텍스트가 스피커를 통해 우리에게 들림과 동시에 이 낭독재생 텍스트를 또 한번 마이크를 통해 녹음한다. 스피커를 통해 재생되는 목소리를 계속 마이크로 녹음하고 또 이를 재생함으로서 오리지널 사운드는 점점 변형되기시작한다. 여러번의 녹음 과정을 거듭하면서 ('generation'을 지남), 원래의 텍스트녹음은 점점 옅어지며, 그 공간이 함축하는 특유의 잔향과 리버브에 따라 변형된다. 즉, 공간을 소리화시킨다고 볼 수 있다. 많은 generation 이 거듭될수록, 본래 텍스트의 내용이 이해되기 어려울정도로, 본디의 음향성격은 소멸되고, 주어진 공간에 의해 변화된, 텍스트의 변용체만이 남게 된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구체적으로 우리 귀에 남게되는 것은 원래 텍스트의 형체에 의해 만들어진 음향 현상, 즉 특정한 음정이나 그에 따라 생성되는 배음현상과 잔향이 어울어진, 복합적인 음향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녹음과 재생의 Loop"를 45분동안 반복함으로서 결국 45분이후에는 원래의 낭독소리가 그 공간이 갖는 공명의 소리로 바뀐듯, "내가 앉아 있는 공간이 갖고 있는 공간자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서 결국에는 “공간“자체가 음향화 되어간다고 볼 수 있다.
루시에는 악보에 명시하기를, 반드시 이 텍스트가 아니더라도 이와 같은 길이의 텍스트이면 다른 것이라도 상관없다고 말하고 있으나, 텍스트의 내용이 이 퍼포먼스의 전반적인 내용을 설명한다는 점에서, 이만큼 적절한 텍스트는 찾기 어렵다고 볼 수 있다.
루시에는 더글러스 사이몬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각 공간에는 나름대로 숨겨진 멜로디가 있습니다. 이들은 누군가에 의해 자신의 정체가 발견되고, 그로 인해 소리로서의 실체를 들어낼 수 있기를 기다리고 있지요....”
이 작품의 악보를 보자. 그의 다른 대부분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악보는 소리음으로 표기되어 있지 않고, 문장으로 서술되어 있다. 언뜻보면 어떤 상황의 "지시문" 처럼 보이는 그의 "악보" 는, 흔히 우리가 접하는 악보들처럼, 무얼 어떻게 연주함으로써, 어떤 음이 어떤 식으로 들려야 하는가 하는 음향적, 내지는 음악적인 결과를 표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작품을 구성, 연주하는 동안에 어떤 일들이 어떤 식으로 일어나야 하는지를 적은, “작품 아이디어 해설과 그 실현에 관한 지침서”와 같이 보인다. 이 작품을 연주했을 때, 결과적으로 어떻게 들릴 것인가하는 사실을 악보만 보고는 짐작 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악보의 마지막 부분에는 장비를 설치하고 작품을 연주할 경우에 따르는 여러 가지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어 “I am sitting in a room" 의 경우, 위의 실험을 하나의 정해진 홀에서만 실행하는 대신, 여러 다른 홀을 이용하여 행하여 본다든지, 두 개의 스피커 대신 여러 개의 더 많은 스피커를 사용하는 것, 또 주어진 텍스트를 여러 다른 언어로 낭독해 보는 것, 같은 공간 안에서 마이크의 위치를 다양하게 바꾸어 보는 것 따위를 예로 들어 권하고 있다. 사실 이 작품은 마이크와 스피커, 녹음기만 있으면 누구나 어디서든지 해볼 수 있는 작품이란 점에서,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독자들도 직접 실험해 볼 수 있을 것이고 이 경우 그의 권고대로 다양한 방법을 사용해보면, 매우 유익한 실험이 될 것이다.
이 작품에서 흔히 거론되는 또 하나의 특징은, 테이프라는 매체에 “녹음“과 “재생“이라는 역할을 분담시킴으로서, 테이프라는 하나의 매체가 모든 상황을 주관하는 하나의 악기로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유사한 시도는 슈톡하우젠의 작품 ”쏠로“ ("Solo" for melody instrument with feedback, 1965-66)에서도 엿 보인다. 이는 자기테이프라는 매체가, 어떤 작품아이디어를 실현시키기 위한 도구로서만 사용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가 확대된 영역에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아주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이렇게 하나씩 악기를 개발해 나가는 것 또한 실험예술에서는 매우 중요한 ”실험정신“으로 통한다.
루시에의 작품 중 또 다른 한 작품을 보자. 그의 작품 중에 “독주자를 위한 음악 (1965)” 이라는 작품이 있다. 원제는 “Music for Solo Performer" 이고 이에 ‘for enormously amplified brain waves and percussion’ 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이 작품에서 루시에는 뇌파인 알파 웨이브가 8 에서 12 헤르츠 사이를 오간다는 점에 착안, 이를 매우 강하게 증폭시킴으로써, 이 파장으로 하여금 다른 음향현상을 야기시키게 끔 하고 이를 청취가 가능하도록 만든다. (본디 사람 귀에는 약40헤르츠 이하의 진동은 들리지 않는다.) 이러한 알파 웨이브는 사람이 눈을 뜬 상태에서 시각을 활용할 때, 또는 눈을 감고 정신을 활성화시킬 경우, 예를 들어 명상을 할 경우, 그 활동에 방해를 받는다. 즉, 알파 웨이브는 다른 무엇보다도 순전히 그 사람이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제어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연주자가 전기를 측정할 수 있는 ‘일렉트로드‘를 머리에 부착시켜 뇌파가 감지 될 수 있도록 준비 한 뒤, 감지되는 알파 웨이브를 증폭기에 보낸다. 이는 증폭을 거쳐 스피커로 보내진다. 강하게 증폭된 알파 웨이브는 스피커를 거쳐 일정한 진동파로써 재생이 된다. 한편, 스피커의 바로 앞에
는 여러 가지의 타악기 - 예를 들자면 공, 팀파니, 베이스 드럼 따위 - 가 놓여 있고, 이들은 스피커를 통해 전달되는 증폭된 알파 웨이브의 영향권 아래에 놓이게 된다 . 즉 독주자는, 자신의 눈을 청중 앞에서 떴다 감았다 함으로써, 알파 웨이브를 본인의 의사에 따라 전달하기도 하고 방해하기도 할 수 있다. 이를 스피커를 통해 파장으로 연결함으로서 타악기에 진동을 가할 수가 있고, 결과적으로는 악기의 소리가 울리게 되는 현상이 벌어진다. 자동적으로 ”연주“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연주자는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는냐에 따라서, 눈앞에 놓여 있는 북을, 손을 직접 대지않고서도 울렸다 멈췄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독주자는 매우 신중을 기해야 하는데, 이는 절대로 몸을 움직이면 안된다는 사실이다. 연주자의 자그마한 몸짓은 금방 알파 웨이브를 마비시켜버리고, 그럼으로서 결과적으로는 타악기가 울리는 대신 아무소리도 나지 않게 되고 침묵만이 흐르게 되기 때문이다. 즉 연주자는 정신력을 집중시키고 고도로 긴장한 해야하며, 신체를 전혀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 뇌파에 온 에너지를 집중시키고서 연주를 해야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분명히 위의 연주 결과를 테이프에 녹음시켜, 전체를 테이프 작품으로 남기는 것보다 많은 요소를 함축한다. 작곡가는 이곡을 라이브로서 청중앞에서 연주함으로서, 눈앞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에, 청중이 같이 동참하게 되는것을 전제로 한다. 루시에는 이러한 이유 외에도, 위와 같은 물리적 변화가 테이프에 녹음되고 재생이 될 경우, 그 다이내믹의 표현과 영역이 100% 원래 상태대로 재생되기가 어려움을 언급하면서, 이 작품이 라이브로 연주가 되어야함을 강조했다.
이렇게 라이브는 청중과 교감을 나누는 부분이 테이프 음악에서보다 더 중요하고 포괄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많은 요소들이 음악적 아이디어에 용해될 수 있고, 이것이 연주를 통하여 시각적으로 전달되는 몫도 전체에서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한다. 즉, 무대위의 연주자들은 작품을 연주한다는 단순한 사실외에도 그 작품이 함축하고 있는 다른 요소들도 연주를 통하여 청중들에게 전달하여야 하는 사명을 띄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여태까지 살펴본 전자 음악분야에서 뿐만이 아니라, 고전음악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로 갖고 있는 성격으로서, 무대 예술이 공통된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무대에서 약간의 “쑈우맨쉽”을 발휘하는 것도 상황과 장소에 따라 필요할 수 있고, 그런 점에서 연주자들은 무대에서의 연주할 때 어느정도는 시각적인 연출이 필요하다는데 대해 (특히 전자음악에 있어) 진지하게 연구해보아야 할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또다시 여담으로 넘어간 것 같다. 루시에와 같이 자신만의 실험정신을 바탕으로 한 작곡가들의 음악철학에 대해서는 다음호에서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본 글은 「월간 음악춘추」 2000년 11월호에 연재되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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